저작자: 강기봉 freekgb@gmail.com
2021년 6월 30일에 대법원은 계약 관계에 있는 자들 사이에서 계약이 성립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계약 상대방의 성과물을 부당하게 이용한 경우라면 민법상 불법행위책임을 질 수 있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일반 불법행위의 성립요건으로서 위법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 (카)목이 입법되기 전의 '성과물 도용 법리'를 인용하면서 계약 관계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행위를 방지할 수 있는 기초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작자가 위탁업무에 대한 계약 과정에서 또는 수행 과정에서 자신의 성과물을 상대방에게 제공한 경우에, 그 성과물이 저작물로 성립하지 않더라도 당사자 간의 신의성실의 원칙을 저버린 행위에 대해서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논리는 위와 같은 사례 외에도 모든 지식재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이 판례는 창작자가 자신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당한 경우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부정경쟁방지법 이외의 또 다른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습니다.
아래는 판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대법원 판례의 내용을 재구성하고 다소 수정하였고, 대법원의 주요판결 게시판의 내용 중 사실관계 부분을 인용하고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판례정보
- 판례번호 : 대법원 2021. 6. 30. 선고 2019다268061 판결
- 대략적인 사실관계 : 원고는 피고 대한민국 산하 ○○대학교 ○○연구원(이하 ‘○○연구원’)과 협력하여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의 번역 사업을 수행하기로 하고, 교감·표점 작업을 거쳐 번역 작업을 수행해 왔으나, 정식 번역계약이 체결되기 전에 위 협력 사업이 종결되었고, 이후 피고들에 의하여 임원경제지 중 위선지, 만학지 부분이 번역, 출간되었음. 이에 원고는, 원고가 교감·표점 및 번역 작업을 하여 작성한 번역본 초고(이하 ‘원고 번역본 초고’)를 피고들이 무단으로 이용하여 위선지, 만학지를 출간하였고, 이러한 피고들의 행위는 ① 원고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거나, ② 민법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주장하였음. 그러나 제1심과 원심은 원고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였고, 원심판결에 대하여 원고가 상고하였음
□ 대법원 판결
- 원고가 한문 고전의 번역물, 그 중에서도 특히 교감(校勘), 표점(標點) 작업의 결과물은 새롭게 창작한 부분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저작물성이 없음(한문 고전의 2차적저작물로 성립할 수 없음). 그리고 저작물성이 없는 것을 이용하였다면 저작권 침해가 성립하지 않음.
- 다만, 민법 제750조의 취지에 따라 저작권과 같은 권리의 침해가 없더라도,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 체결의 준비 단계에서 협력관계에 있었던 당사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해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피고의 행위는 계약 체결을 위한 교섭 과정에서 상대방의 기대나 신뢰를 보호하고 배려해야 할 의무를 위반하면서 상대방의 성과물을 무단으로 이용한 경우에는 당사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해칠 뿐만 아니라 상도덕이나 공정한 경쟁질서를 위반한 것으로서 이 규정에 따른 불법행위책임이 있다.
□ 저작물성이 인정되지 않은 구체적 이유
- 저작권법상의 저작물성 판단 기준 : 제2조 제1호는 저작물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정하여 창작성을 요구하고 있다. ‘창작성’이란 완전한 의미의 독창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창작성이 인정되려면 적어도 어떠한 작품이 단순히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사상이나 감정에 대한 창작자 자신의 독자적인 표현을 담고 있어야 한다(대법원 2018. 5. 15. 선고 2016다227625 판결, 대법원 2020. 4. 29. 선고 2019도9601 판결 참조). 누가 하더라도 같거나 비슷할 수밖에 없는 표현, 즉 작성자의 창조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은 창작물이라고 할 수 없다(대법원 2011. 2. 10. 선고 2009도291 판결 등 참조).
- 원고 교감(校勘), 표점(標點) 작업의 결과물의 저작물성 : 원심판결에 기재된 원고 저작물(이하 ‘원고 저작물’이라 한다)은 위선지의 원문에 교감(校勘), 표점(標點) 작업을 한 부분과 이를 번역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감(校勘)’은 문헌에 관한 여러 판본을 서로 비교․대조하여 문자나 어구의 진위를 고증하고 정확한 원문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표점(標點)’은 구두점이 없거나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한문 원문의 올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표점부호를 표기하는 작업이다. 원고 저작물에서 교감 작업을 통해 원문을 확정하는 것과 표점 작업을 통해 의미에 맞도록 적절한 표점부호를 선택하는 것은 모두 학술적 사상 그 자체에 해당한다. 그러한 학술적 사상을 문자나 표점부호 등으로 나타낸 원고 저작물의 교감․표점 부분에 관해서는 원고와 동일한 학술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논리구성상 그와 달리 표현하기 어렵거나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으므로, 이 부분은 결국 누가 하더라도 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 저작물 중 교감한 문자와 표점부호 등으로 나타난 표현에 원고의 창조적 개성이 드러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원심이 같은 취지에서 원고 저작물의 교감․표점 부분이 창작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옳다.
□ 저작권 침해를 부정한 구체적 이유
- 의거성과 실질적 유사성의 판단 : 저작권 침해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침해자의 저작물이 저작권자의 저작물에 의거(依據)하여 그것을 이용하였어야 하고, 침해자의 저작물과 저작권자의 저작물 사이에 실질적 유사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대법원 2007. 12. 13. 선고 2005다35707 판결, 위 대법원 2019도9601 판결 참조). 저작권의 보호 대상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말, 문자, 음, 색 등으로 구체적으로 외부에 표현한 창작적인 표현 형식이므로, 저작권 침해 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두 저작물 사이에 실질적인 유사성이 있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창작적인 표현 형식에 해당하는 것만을 가지고 대비해 보아야 한다(대법원 2000. 10. 24. 선고 99다10813 판결 등 참조). 그리고 복제된 창작성 있는 표현 부분이 원저작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양적․질적 비중 등도 고려하여 복제권 등의 침해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12. 8. 30. 선고 2010다70520, 70537 판결 참조).
- 원심판결에 기재된 피고 저작물(이하 ‘피고 저작물’이라 한다)이 원고 저작물에 의거하여 작성된 사실을 추인할 수 있으나 원고 저작물과 피고 저작물 사이에 실질적 유사성이 인정된다고 보기 어려워 피고들이 원고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 민법 제750조에 기한 불법행위책임의 성립 : 손해배상 책임의 인정
- 민법 제750조(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의 적용 가능성 : 위법행위는 불법행위의 핵심적인 성립 요건으로서, 법률을 위반한 경우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 법질서의 관점에서 사회통념상 위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도 포함할 수 있는 탄력적인 개념이다. 대법원이 소유권 등 물권을 침해하지 않은 경우에도 민법 제750조의 위법행위 개념을 활용하여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타인의 성과물을 도용하였다는 이유로 위법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도 이에 속한다. 즉, 대법원은 경쟁자가 상당한 노력과 투자에 의하여 구축한 성과물을 상도덕이나 공정한 경쟁질서에 반하여 자신의 영업을 위하여 무단으로 이용함으로써 경쟁자의 노력과 투자에 편승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얻고 경쟁자의 법률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는 부정한 경쟁행위로서 민법상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대법원 2010. 8. 25.자 2008마1541 결정 참조.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 (카)목이 도입되기 전의 '성과물 도용 법리').
- 신의성실의 원칙과 불법행위책임 : 대법원은 계약 교섭의 부당파기에 관한 사례에서 일정한 요건 하에 불법행위의 성립을 긍정해 왔다(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1다53059 판결, 대법원 2004. 5. 28. 선고 2002다32301 판결 등 참조). 계약 체결을 위한 교섭 과정에서 어느 일방이 보호가치 있는 기대나 신뢰를 가지게 된 경우에, 그러한 기대나 신뢰를 보호하고 배려해야 할 의무를 부담하게 된 상대방이 오히려 상당한 이유 없이 이를 침해하여 손해를 입혔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 체결의 준비 단계에서 협력관계에 있었던 당사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해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계약 체결을 위한 교섭 과정에서 상대방의 기대나 신뢰를 보호하고 배려해야 할 의무를 위반하면서 상대방의 성과물을 무단으로 이용한 경우에는 당사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해칠 뿐만 아니라 상도덕이나 공정한 경쟁질서를 위반한 것으로서 그러한 행위의 위법성을 좀 더 쉽게 인정할 수 있다.
- 불법행위 성립의 판단 : 불법행위의 성립 요건으로서 위법성은 관련 행위 전체를 일체로 보아 판단하여 결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문제가 되는 행위마다 개별적ㆍ상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1. 2. 9. 선고 99다55434 판결 등 참조). 소유권을 비롯한 절대권을 침해한 경우뿐만 아니라 법률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에도 침해행위의 양태, 피침해이익의 성질과 그 정도에 비추어 그 위법성이 인정되면 불법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
※ 주요판결 게시판 주소(판결문 포함) : https://www.scourt.go.kr/supreme/news/NewsViewAction2.work?pageIndex=1&searchWord=%C0%FA%C0%DB%B1%C7&searchOption=&seqnum=7795&gubun=4&type=5
※ 대표 이미지 출처 : 계약과제휴_사진_011,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CC BY,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71619&menuNo=2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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